비는 내리고 벽에는
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는데
우산 하나 없이 길을 걷는다
집 없이 길을 떠나고
집 없이 길에 잠든다
죽은 사람이 잠들지 못하는 새벽
관 없이 길에 묻히고
관 없이 길에 잠든다
나는 잠는다 아무 것도 없이

싸구려 단파라디오 스위치를 올려본다. 잠 못드는 여름밤의 창가에 서서 안테나를 한껏 올려 조심스레 주파수를 돌리면... 몇 천, 몇 만 킬로미터를 쉼없이 날아와 잠시동안 또렷해지려다가 어느새 막막해져가는 매 시각의 정각 시보나 틀에 박힌 국제뉴스. 아니면 머나먼 나라의 편지와 엽서를 읽어가는 목소리, 목소리들... 유난히도 예민하게 뻗은 2만원짜리 싸구려 단파라디오의 안테나... 전리층을 타고 온 약하디 약한 전파 속, 힘겹게 잡아 낸 그 모든 이야..